
청예의 주와 연 은 환생과 무속을 소재로 한 오컬트 미스터리이자 복수극입니다 열일곱 살 오주희는 아버지의 외도로 가정이 무너진 뒤, 무당의 힘과 부적을 통해 아버지와 계모 사이에서 태어나는 딸 오연린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시작된 두 번째 삶의 목적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향한 복수입니다 복수와 환생이라는 강렬한 설정 때문에 처음에는 통쾌한 복수극을 예상하기 쉽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작품은 복수의 성공 여부보다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전생의 원한을 품고 다시 태어난 삶은 과연 새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환생, 전생의 원한을 품고 시작된 두 번째 삶
주희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복수를 원하는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끝나버린 삶이기에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똑같이 돌려주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연린으로 다시 태어난 순간부터 생각은 조금 복잡해집니다 주희에게 환생은 복수를 완성할 두 번째 기회이지만, 연린이라는 한 사람의 삶으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복수를 이루면 주희의 목표는 달성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린의 삶까지 행복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연린은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이 이어지면서 두 번째 삶 역시 전생의 상처와 원한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와 연을 읽으며 환생이 반드시 축복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얻었음에도 과거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끝났어야 할 고통을 다시 이어가는 일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복수, 원한을 끝내려다 다시 만들어지는 인연과 업
주와 연 에서 복수는 주인공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전생에서 시작된 원한이 후생까지 이어지고, 복수를 이루기 위한 선택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냅니다 그렇게 주인공의 삶에 얽힌 사람들까지 과거에서 시작된 원한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 지점에서 복수가 정말 원한을 끝내는 방법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시작한 일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감정과 관계가 만들어진다면 원한을 풀었다기보다 또 다른 악연과 업을 만들어낸 것은 아닐까요 작가 청예 역시 이 작품을 단순히 복수는 어리석은 것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복수 또한 하나의 선택이며, 그 선택에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와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생긴다는 관점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가차 없는 불륜 응징극으로 구상했지만 인물들에게 각자의 사정과 감정을 부여하면서 단순한 권선징악을 넘어 인물의 삶과 모순을 다루는 이야기로 변화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의 성공이나 실패만은 아닙니다 복수를 선택한 이후 그 선택이 한 사람의 삶을 어디까지 끌고 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관계와 감정까지 바라보게 합니다
망각, 어쩌면 잊는 것 또한 축복일 수 있다
주와 연 을 읽고 가장 오래 남은 생각은 오히려 망각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한 생이 끝났을 때 그 생에서 겪었던 일을 모두 잊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일까요 소중했던 사람과 행복했던 순간까지 잊는다고 생각하면 망각은 슬픈 일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기억은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만, 어떤 기억은 사람이 평생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만약 주희의 삶이 전생에서 완전히 끝나고 연린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태어났다면 주희에게는 억울한 결말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연린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자유였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해야 할 이유도,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도 없이 자신의 삶을 처음부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의 제목인 ‘주와 연’은 주희와 연린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가져온 것이면서 동시에 저주와 인연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생에서 끝났어야 할 원한이 후생까지 이어지면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그 인연은 다시 누군가의 삶에 흔적을 남깁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복수의 통쾌함보다 무엇을 놓아야 비로소 한 삶이 끝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했습니다 억울했던 일을 잊는다는 것은 용서와는 조금 다른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한 생의 아픔을 그 생에 남겨두고 다음 생에서는 갚아야 할 것도, 미워해야 할 사람도 없이 다시 시작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잊을 수 있는 것 또한 하나의 해방이며 축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오래 남는 소설이었습니다